문화시론
대안미술의 한 흐름, 공동체미술과 생태미술

공공미술, 공동체와 삶의 품으로
 
문화연구소 시월
이광준(홍익대 미학과 석사)


 달콤한 새로운 단어, 다면적이어서 어디다 붙여도 그럴듯한 개념들이 있다. ‘대안, 공공성, 공공미술’이 그렇다. 아뜨리에와 상업갤러리와 미술관에 뿌리를 둔 소장가치로 존재하는 미술들, 생활과 떨어진 미술들에 대한 비판적 작업은 일상에 대한 관심과 공공미술에 대한 실천의 방향으로 예술가나 기획자들의 관심을 옮아가게 했다. 미디어시티의 지하철프로젝트, 지하철공연, 탄광촌미술관, 지하철 차량 전시인 와우프로젝트,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전, 광주비엔날레의 몇몇 기획들이 그것이다. 또한 공공미술제도 도입을 위한 예술인협의회(공미협)의 활동처럼 부패와 불합리 속에서 만들어지는 도시 쓰레기를 연상시키는 빌딩앞 환경조형물 제도 개선을 위해 공공미술기금 또는 재단의 설립을 통해 도시개발과 건축에서 미술의 역할을 높이고 질높은 미술품을 창작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실천의 형태도 있다.
 그러나,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전시나 제도 개선 운동이 스스로를 공공미술작가나 공공미술그룹으로 호명하려면 창작과 예술실천에서 “공공성”과 삶의 질과 공동체와의 소통에 대해 물음을 던져야 한다. 메트로폴리스의 공공미술이 수많은 도시의 소수자를 위한 미술이 될 수 있을까? 환경조형물을 만들 돈으로 노숙자를 위한 이미지건물, 빈민가 공부방의 공공적 리모델링, 미혼모를 위한 생태건축, 청소년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작품의 맥락과 가치를 공급하는 공동체에서 호흡하는 공동체미술가는 몇이나 되는가? 지역사회의 역사와 정서 그리고 시민사회의 비판성와 호흡하지 않는 예술이라면?
  제도화를 목표로 하는 공공미술은 기존의 많은 제도화 노력이 그랬듯 구조의 변화없이 좀 더 좋은 주체로 권력이 바뀌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작품의 소재지만 미술관에서 공공장소로 바뀌거나 나쁜 환경 조형물에서 좀 더 좋은 환경조형물로 달라질 수도 있다. 통일과 비례와 질서와 계시의 미술이 충격과 폭로와 비계시의 예술로 바뀌었다고 해서 자기존재의 정당성을 갖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미디어의 육화와 대중예술의 확장 속에서 공공미술에 대한 예술가의 깊은 직관으로 윤리적인 것과 미적인 것을 결합하고 아방가르드와 대중주의를 결합하며 도시개발과 건축에서 “예술적인 것”을 개입시키는 방향으로 예술의 전환을 시도하는 그룹을 상기해보는 일은 재미있는 상상이다. 공동체미술과 생태미술에서 이러한 상상을 도모할 사례로 인천에 근거를 둔 반지하 그룹의 <디지털인천하우스>와 원주 문막 진밭마을 주민들의 <숲과 마을 미술축전>을 살펴보자.
  반지하그룹의 인천 난개발에 대한 보고서인 <디지털 인천하우스>는 인천의 난개발 속에서 여전히 삶의 숨결로 서있는 서민들의 주택을 대상으로 디지털사진 데이타베이스를 구축한다. 전시를 한 후 각각의 작업을 다시 디지털사진의 출생지인 동인천 화교촌, 구월동, 송림동, 가정동, 십정동의 주택으로 되돌려보내는데 이를 토대로 지역 공동 문화 프로그램 개발을 하려는 전시이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숲과 마을 미술축전>은 원주 진밭마을에 사는 판화가 김봉준씨와 지역 작가들이 만든 마을축제에서 시작된 행사로 인근 원주나 주변 지역작가들이 참여하여 마을 주변 전시, 마을회관 전시와 더불어 주변 어린이와 주민들이 참여하는 미술체험 등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공동체미술, 생태미술이 당위적이고 주변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생태철학자 안네스(Ann Naess)의 말대로 표층적인 인식보다는 심층적인 영역에서 시작하여 다시말해, 근본적인 것 위에 현실성을 쌓는 흐름만이 “대안”일 수 있다. 공동체미술이나 생태미술은 조경, 건축, 디자인, 인테리어, 공학, 과학기술을 반성적으로 검토하고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너니즘의 지층을 생태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실천을 할 때 대안성을 현실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기존 미술사를 채집하고 패러디하여 현재의 텍스트를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다. 마르셀 뒤샹, 존 케이지, 요셉보이스, 백남준, 로버트 스미드슨 등이 예술이 나아가야 곳으로 제시했던 방향 속에 생태적 공동체적 텍스트와 만나는 방식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성적이고 지적인 미술을 추구했던 모더니즘 예술가 공동체의 ‘예술가’와 공공미술 속에서 작품의 맥락과 가치를 공급하는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려는 ‘예술가’의 상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단지, 삶의 모습과 예술을 하는 과정자체가 아주 다를 뿐이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신문 113호(2002년 5월)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