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를 기반으로 한 지향의 공동체

관리자 | 2015.09.30 09:39 | 조회 65



생활문화를 기반으로 한 지향의 공동체

<퍼포먼스 반지하> 드라마고 대표를 만나다



▲생활문화협동조합 <퍼포먼스 반지하>는 2001년부터 꾸준히 지역문화활동을 이어온 단체다. 초기에는 재개발로 인해 구도심 지역의 삶이 파괴되는 문제를 다큐멘터리로 기록하기도 하고, 정보통신 검열 문제, 미대사관 이전 문제 등 한국사회가 가진 다양한 문제들을 거리극 형태의 사회적 퍼포먼스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퍼포먼스만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것이 가능한가?'라는 스스로의 질문이 발생했고, 2003년부터는 삶에서부터 답을 찾기 위해 지역문화 활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반지하>가 재개발 지역의 생활상을 기록했던 것은 우리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빈곤이 대물림되고, 사회적 약자가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은 개인적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구조에서 기인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진행되는 재개발 등의 도시계획은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기 보단 지역공동체를 파괴하곤 했다. <반지하>는 이제 반대와 저항만이 아니라 공동체성이 파괴된 마을이 가질 수 있는 문화적 대안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지역에서, 생활에서부터 풀어내려 했던 다양한 노력은 노력은 단체를 생활문화협동조합의 형태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예술은 왜 생활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걸까? 마을에서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예술가는 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또 지역공동체를 위한 예술은 어떤 것일까? 다양한 질문을 품고 드라마고 대표와 만났다.



Q) 어떻게 예술활동 안에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내시게 되었나요? 예술가는 자기 작품을 열심히 만들고, 정진하는 사람인줄만 알았습니다.


예술은 사회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대학 시절부터 예술은 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낯선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예술가는 늘 작품이 가진 사회적 의미에 대한 공부나 고민을 끊임없이 전개해야 한다. 예술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독창성을 발휘한 유무형의 결과물 중에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것들이 작품으로 여겨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소통의 징검다리가 될 만한 키워드가 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말은 ‘반성’이다. 그동안 ‘성찰’, ‘진정성’이라는 말도 많이 썼는데, 이 두 단어는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아서 이제는 잘 쓰지 않는다. 예술활동을 할 때 자신이 살아가면서 만난 삶의 문제들, 사회적인 문제들에 비추어 활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동안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자기 혼자 성찰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스스로 진정성이 있다고 믿으면 진정성이 생기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가 많이 있었다. 예술가 자신만의 성찰과 진정성만 가지고 과연 우리가 공동으로 살고 있는 사회, 지역, 시대의 문제를 폭넓게 발견할 수 있는가? 이렇게 질문했을 때 어떤 사람도 답을 주지 못했다. 지금은 다양한 담론이 나오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부터 15-20년 전에는 그런 일이 잘 안 일어났다.

<반지하>가 만들어지게 된 이유는 그런 거다. 질문에 대한 답을 남에게서 얻지 못한다면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 문제 해결을 남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야 한다는 반성이다. 반지하라는 말은 지상과 지하의 중간 위치, 제도세계와 반제도세계의 가운데라는 뜻으로, 지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사회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사이를 뜻하는데 반성의 ‘반’이 반지하의 ‘반’과도 뜻이 상통한다. <반지하>의 출발이 내가 스스로 예술과 사회의 문제를 찾아서 어떤 형태로든 작업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는 반성에서 시작한 것이니까.


평범한 예술, 비범한 일상

“생존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이 문화고, 그 다음이 예술이다. 이것을 거꾸로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큰 문제다.” 지난주 수업 때 다루었던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말이다. 선생 같은 문학의 대가도 세상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예술가들은 예술이 일순위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놓치곤 한다. 정작 예술의 대상인 사회와 민중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기 때문이다. 삶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행위양식들이 있다. 생각하고, 행동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문화다. 음식을 나눠먹고, 옷을 만들어 입고, 함께 살아가면서 생기는 것 말이다. 예술은 그러한 문화 안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부분이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예술을 다룬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기본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다. 문화예술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있는 사람 대부분이 스스로 밥을 지어 먹는다거나, 옷을 꿰매서 입는다거나, 이웃과 물건을 나누어 쓴다거나 하는 실질적인 생활은 마치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살면서 문화와 예술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반지하가 예술보다 문화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게 된 이유, 생활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반성과 인문학을 강조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술가들이 이 부분을 놓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우리나라의 장르 중심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예술을 말할 때 장르 이전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하는데 전문성을 너무 중시하다 보니 전공만 중요하게 여기고, 그 안에 있어야 할 인간에 대한 생각, 반성에 대한 생각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장르 이전의 이야기로 만난다는 것은 자기가 실천한 실제 내용을 가지고 만난다는 것을 말한다. 소위 전문성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무엇인가? 책에서 읽은 내용, 다른 사람이 한 이야기, 외국의 사례를 마치 내가 한 이야기인양 옮겨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구체성이 빠진 내용들이 아니라 자기 삶의 내용으로 만나야 한다. 세간에서 똑똑하고, 전문적이고,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오류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반성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경계를 지어 놓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지속적이고 반성적으로 해체할 필요가 있다.



Q) 보통 사람들은 생활에서 문제의식과 마주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어려우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라며 넘기곤 하는데, 이런 문제를 풀어보고자 고민을 밀고 나가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요?


불편함이 질문의 출발이다

생활의 문제들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적 표현에 이르기까지는 긴 호흡이 필요하다. 그렇게까지 고민을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개인적인 가능성은 끊임없는 불만 때문이었다. 좋게 표현하면 비판적 사고이고, 편하게 이야기하면 불만이다. 이러한 사고가 발전하는 이유는 사는 게 불편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데 왜 먹을 게 없지?”, “다른 사람들이 내게 친절했으면 좋겠는데 왜 불친절하지?” 와 같은 것들은 단순히 궁금한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것들이 부재하면 불편해진다. 먹는 것, 소통하며 살아가는 것은 없어서 부족한 게 아니라 엄청 불편한 것이고, 그 불편함이 극에 달하면 분노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가족적인 문제, 상황적인 문제, 시대적 문제로 이런 상황과 마주한다. 일례로 경쟁적 삶을 강요받는 우리 사회 안에서는 사랑스러운 자식에게 남과 경쟁하라고 주문하고, 경쟁에서 지면 못난 자식이라고 욕을 하는, 이해가 안가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러고 보면 개인적으로는 내가 꼭 경쟁, 돈, 성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불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생활적 문제가 현재의 예술적 표현으로 연결되게 만든 것은 어느 순간에 알게 된 반성이라는 것이었다. 질문만 던지는 게 아니라 질문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책임 있는 나의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말이다. 그런 것이 내가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인 듯하다.



Q) 양질의 문화와 예술을 누구나 누린다면 참 좋겠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높은 경지를 보여주며 감동을 선사하는 예술영역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생활문화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엘리트문화를 넘어 생활문화로

순수예술이라고 말하는 예술의 큰 영역들은 사실상 순수예술이기보다는 엘리트예술에 가깝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서 엘리트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비싼 악기로 연주한 곡을 감상한다거나, 돈이 많이 드는 공연장, 갤러리에 전시된 것들을 감상한다거나, 수상을 해야 인정받는 엘리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대중예술이 있다. 미디어가 발달하기 전에는 미미하다가 라디오-텔레비전-인터넷-퍼스널미디어가 발달되면서 생긴 분야다. 지금은 퍼스널미디어도 대중 매스미디어 안에 편입되어 버렸다. 대중예술은 한마디로 소비문화의 단면일 뿐이다. 그 단면을 숨길 수 있는 장치로서 엘리트예술의 일부를 가져다 쓰곤 한다. 쉽게 말해 연예인 문화 같은 것들이 대중소비문화다. 소비를 조장하는 문화를 고상하게 포장한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이 ‘생활문화’다. 생활문화를 소개할 때 미술 쪽에서 유명한 사건으로 꼽는 것이 인상파에 대한 이야기다. 과거 엘리트들이 그림을 잘 팔고, 턱시도 입은 부자들이나 갤러리에서 그림을 감상하던 때, 시대를 새롭게 바라보고자 노력했던 가난한 예술가들의 표현은 무언가 특이했다. 그래서 인상파가 된 것이다. 인상파 화가로 불리는 고흐와 고갱이 주목했던 것은 생활 이야기였다. 고갱은 원주민의 생활 이야기, 고흐는 대부분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렇게 보면 엘리트예술과 생활예술의 다른 점이 드러난다. 예술가 중에서도 생활예술을 지향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고 있는 대중 또는 민중들은 과연 엘리트예술과 대중속의 문화들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예술가도 생활자다. 그림에서 민화, 글쓰기에서는 규방가사 같은 것들이 생활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우리나라도 90년대에는 우리 정체성 찾기 운동이라고 해서 이런 것들을 찾는 운동이 활발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그 이유는 그 사이에 대중소비문화가 너무 많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래서 반성이 필요하다는 거다. 사람들이 평상시에 일기를 쓰면서 자기 생활을 잘 기록하는지, 자기 생활을 노래하는 동네 가수가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동네 가수는 동네 이야기를 노래할 테니 대중가수와는 다를 것이다. 대학 교수들은 강단 뿐만이 아닌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마을을 예술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살펴봐야 한다.


일상의 태도를 살펴보자

이런 비판적 사고를 하다 보면 결국에는 생활에서 예술을 바라보게 된다. 내가 발견한 생활예술의 핵심은 ‘생활 태도’다. 생활자이면서 예술가일 수 있는 것은 생활태도에서 결정된다. 자신이 매일 마주하는 자기 집이나 내가 만든 음식, 만지는 물건을 늘 새롭게 볼 수 있는가? 더 나아가면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당신, 이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가? 그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미래의 희망이 있다면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일상에서 소통하는 언어를 늘 새롭게 바라보면서 문학적인 언어로 끌어 올리는 것, 가난하고 남루한 삶일지라도 소품, 음식, 옷 하나하나 소중하게 여기는 생활자로서의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태도를 통해서 생활 속에서 예술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생활 태도를 다룬 것이 <인연어 대화>라는 작업이었다. 문화활동가, 예술가들과 집단적으로 소통을 했을 때 대화만으로는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사람의 생활을 들여다봐야 한다. <인연어 대화>에서 나온 첫 번째 이야기는 다른 사람 집에 방문을 했을 때 음식을 먹고 마시고 나서 치우지 않고 가는 것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으레 ‘손님이니까 대접을 받고 그냥 가도 되지’라고 생각하기 마련인 상황이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니고 사용한 것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다는 것이며, 내가 아니면 누군가가 대신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발견이 중요하다.

지금 (인터뷰를 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이 책상은 내가 만들었다. 이 문장 자체는 짧고 단순하다. 하지만 이 단순한 문장 속에는 상당히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완성되기까지의 시간, 재료에 대한 이해, 제작에 필요한 공부, 왜 만들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민 등등이 담겨 있다. 이런 태도에서 생활과 예술이 만날 수 있게 된다. 일상에서 하나의 사물·시간·사람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느냐가 그 사람을 규정한다. 이것을 살펴본 다음에야 생활자들에게 필요한 삶과 교육(문화예술)을 찾을 수 있고 예술가들에게 부족한 결핍된 덕목을 알 수 있다. 생활예술은 사실상 생활적 태도를 찾는 것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발전시키는 것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소중한 것은 각각 100가지가 있는 법이다. 그중 어떤 사람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예술의 영역까지 끌고 간다. 그 자체는 좋은 것이다. 다만 나머지 99개가 있다는 것을 잊으면 문제가 된다. 자기 것을 예술로 이끌어낸 것은 장려될 일이지만 그것이 나머지 99개보다 우수하거나 잘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태도 면에서 실패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좋은 예술가는 “나는 내 것을 이만큼까지 가져갔고, 그러기 위해서 얼만큼 노동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내 것은 어떻게 발전시킬까를 생각하게 된다. 사실 예술이라는게 그런 효과를 주기 위해 필요한 건데 100가지의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은 차츰 잊혀지고 몇 가지 외에 나머지는 하찮거나 소홀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아마도 지금 겪고 있는 문화활동의 가장 큰 어려움이지 않을까 싶다. 올바른 태도를 보이는 예술가, 리더를 찾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Q) 지금 생활문화협동조합이 된 반지하가 지역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삶과 활동을 일치시키는 일. 마을공동체

지역 활동가에게 활동은 생애적이어야 한다. 어떤 사람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시간은 무조건 흐른다. 모든 인간의 삶은 생애적으로 흘러가기에 생애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늙어간다는 사실과, 다음 세대를 위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애주기 안에서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일까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경쟁도 덜 하게 되고 반성도 작동한다. 그래서 활동의 결과가 다음 세대에게 축적되는 측면에서는 이타적인 생활, 생태적인 생활의 중요성이 고려되는 것이고. 지역 문제 역시 생애적 관점에서 고민했으면 좋겠다.

박경리,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포함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공통점이 있다. 공동체운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활동과 생활이 일치해야 한다.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 마을에서 하는 일들이 당장 무언가 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자기 활동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으면 결국은 이룬 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부분을 계속 반성적으로 천천히 공유해 봐야한다.

예를 들면 공공예술 10년, 문화예술교육 10년이 지났다고 말하는데 지금 무엇이 남았나? 마을공동체지원센터 역시 이 지점을 살피지 않으면 10년이 지나도 지금과 비슷할 수 있다. 마을공동체운동이 생활운동의 영역이기에 일부 성과가 남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생활운동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화나 예술운동이 그랬듯 부문으로 빠지게 된다. 그랬을 땐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활동가에 대한 평가는 자신의 활동과 생활이 일치하느냐가 척도가 될 것이고, 그게 잘 된다면 마을에서의 생활운동 역시 잘 될 것이다. 그런 반성 없이 시간만 흐른다면 문화예술교육·공공예술에 대한 평가와 별반 다름없이 용만 쓰고, 돈만 쓰고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생태운동을 한다고 칼럼을 쓰는 사람이 마트에서 일회용 제품을 쓰는 삶을 산다면 유령 같은 지식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부분들을 놓치고 혼자 열심히 공부해봐야 의미가 없다. 실제로 자기 활동의 결과가 나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운동을 하는 사람 중에 다른 마을에 가서 컨설팅하느라 바빠서 정작 자기 마을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자기 삶의 문제로 인해 이런 활동을 시작했다면, 자기 삶으로 피드백이 되어야 한다. 문제를 느껴서 시작한 활동이라면 그게 곧 자기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삶과 활동이 괴리되지 않도록 살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