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이리도 지지리 가난한걸까?

 

부지런하고 성실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는 그래도 어린 시절 가난이라는 것을 잘 모르고 살았다. 그래도 내가 먹고 살 것은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서울 용산에 있는 요철직물 공장에 20살 때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전철이 아니라 전동차가 용산까지 다니고는 했다. 흔들거리는 전동차에 몸을 싣고 하루 종일 기계를 만지면서도 돈 버는 재미에 피곤함도 느끼지 못했다. 24살 되던 해에 중매로 남편을 만났다. 우리 집에도 없던 텔레비전이 있는 것을 보고 웬만큼 사는 집이라 생각했다. 김 일이 박치기를 하는 레슬링을 보려면 동네 구멍가게에 모두 모여 보던 시절에 텔레비전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집은 부자라고 생각되던 때다.

 

그러나 늘 현실은 내 상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남편은 아예 일할 생각이 없었고, 시아버지는 일수를 찍어 살았다. 그러다가 헌집을 사서 우리가 들어가 살면서 도배 좀 하고 페인트를 칠하면 새 집 같아 보이니 얼른 팔아서 다른 헌 집으로 이사를 갔다. 어떨 때는 일 년에 네 번도 더 이사를 다녔다. 그러니 살림이라고는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젊은 시절 내가 벌어먹고 살다가 내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살림을 살려니 영 갑갑하기만 했다. 그저 놀기만 하는 남편을 무작정 데리고 어시장에 가 생선을 사다가 머리에 이고 서울 신촌 바닥에 주저앉혀 놓고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를 모르던 내가 다른 사람이 다 앉아 팔고 있으니 그냥 앉아 팔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관리인에게 막걸리 값이라도 한 푼 쥐어주어야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나중에 가서야 알았다. 그래도 첫 날 가져간 생선을 모두 팔고 집으로 돌아오니 시어머니 하는 말이 “너 내일도 생선 파러 갈거냐?”하시는 것이 아닌가? 난 울화가 치밀어 절대 안 갈 거라고 얘기하고 다음 날 친정 엄마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했다가 구박만 받았다. “이년아,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 집에서 알아서 주는대로 살일 이지 왜 니가 먼저 일을 만들고 다니러 지랄이야?”라는 엄마의 말에 아무 소리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어찌 주는 것만 먹고 손 놓고 산단 말인가? 결국 집에서 콩나물과 숙주나물을 키워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렇게 조금씩 하던 것이 조금 돈을 모으게 되어 조금 큰 나물방을 차리게 되었다. 그 사이 나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다. 그러나 어디 인생이 좋은 일만 있을 수 있는가. 그즈음 남편은 노름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끊지 못할 거면 집을 나가라는 구박에도 주변머리 없이 순하기만 한 남편은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경제적 능력은 없었어도 순하고 착한 남편이 노름에 빠질 줄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나보다.

 

그렇게 그런 남편과 애 셋을 키우려면 더 억척스럽게 일을 해야만 했다. 송림동에서 태어났지만 인천의 여러 곳을 참 많이도 다녔다. 창영동, 연수동, 김포, 만수동, 그리고 다시 송림동까지 결국에는 내가 태어났던 이곳 송림동으로 다시 돌아오니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지금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동산고등학교 있는 근방에 살았는데 주인이 사글세를 놓는다고 해서 급하게 구한 집이 이 집이었다. 그나마 남편 몰래 계속 모아둔 돈으로 지금 이 집을 살 수 있었다. 그 때가 1995년 겨울이었다.

한옥 구조로 되어 있는 집은 방 두 개와 쪽마루, 창고, 재래식 화장실로 되어 있다. 집을 들어와서 얼마 안 되어 연탄보일러를 기름보일러로 바꾸고 창고로 사용하는 슬레이트 지붕 밑에 아들 방을 만들어 주었다. 이 좁은 집구석에서 다섯 식구가 북적대며 살려면 그 수밖에는 없었다. 못 하나 못 박고, 전등 하나 바꿀 줄 모르는 남편과 살다 보니 웬만한 일은 혼자서도 이제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집 외벽에 양회를 바르는 일도 이번에 내가 직접 했다. 옆 골목에 사는 아지매가 이렇게 하면 된다고 해서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어찌어찌 마무리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 같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사람 한 번 부르면 인건비로 다 나가게 되니 어설프더라도 다 내 손으로 직접 하는 것이 더 속 편하다. 그래도 집안 구조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좁은 마루에 냉장고 하나와 싱크대만으로도 마루는 이미 꽉 차버리고 화장실은 밖에 있으니 영 불편하기만 하다. 그래도 지금이야 남편도 저 세상 가고, 자식들도 모두 출가해서 혼자라 그럭저럭 견딜만하기는 하다.

 

자식들 출가시키면서부터 나는 잔디를 심으러 다니는 일을 시작했다. 몸이 힘들기는 하다. 지금이야 인천에서 일을 하지만 작년에는 강원도 홍천으로 일을 다녔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도시락 싸고 5시에 집을 나서면 버스가 데리러 온다. 홍천에 도착하면 7시 정도가 되고 관광철이 되어 차가 막히면 밤 12시가 돼서 집에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지만 그나마 같이 일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있으니 그 정으로 일 년을 버티며 다니기는 했다. 지금은 그렇게 다시 하라면 다시는 못할 것 같다.

요즈음 나에게는 비 오는 날이 쉬는 날이다. 비가 오면 일당을 못 받으니 수입이야 줄어들겠지만 빚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먹고 살 정도로만 벌면 되니 큰 욕심 안 부리고 살란다. 내 몸이나 더 챙기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부지런히 일하다가 조용히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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