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범 따위에게 무슨 인권이 있냐고?
[미디어초대석] 사형집행 재개, 화학적·물리적 거세, 불심검문재개…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미래인가?
고은태 국제앰네스티 국제집행위원 | media@mediatoday.co.kr  
 
끔찍한 성폭력 범죄가 연이어 발생했고 시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강력한 대책을 주문하는 소리가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국민들의 이런 요구에 기다렸다는 듯 정부와 정치권이 내놓는 대책들이 사형집행재개, 화학적 물리적 거세, 불심검문재개처럼 자극적이고 억압적인 쪽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선정적 범죄에 대한 선정적인 대응은 일종의 쇼와 같아서 범죄에 대한 대책이라기 보다는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편의적이고 전시성인 대응이다. 전형적인 포퓰리즘의 예이자, 동시에 이를 통해 범죄예방에 실패한 국가의 책임마저 범죄자에게 떠넘기는 감정적인 마술인 것이다.

우리의 본능적 감각은 처벌이 강할수록 범죄발생이 낮아질 거라는 선입견을 갖게 하지만, 가장 강력한 처벌인 사형의 범죄예방효과는 입증되지 않았다. 사형이 사회를 안전하게 해주리라는 믿음은 기우제가 주는 정신적 위안 효과에 가깝다. 2011년 전세계에서 사형을 집행한 국가는 겨우 20개국 정도이다. 과연 대부분의 국가들은 국민의 안전에 관심이 없어서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한국인들은 다른 나라의 국민들과는 달리 사형이나 거세와 같은 신체형이 있어야만 사회의 안전이 유지되는 국민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피해자와 가해자의 인권을 대립시키는 괴상한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피해자의 인권에 관심이 있다면, 범죄에 대한 모든 사회적 책임을 가해자의 엄벌로 해소하기 보다는, 범죄피해자 및 그 가족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치료와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통해 범죄로 인한 상처 외의 어려움으로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지 않도록 사회적 지원제도의 개선을 꾀하고, 범죄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고 범인 검거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실질적일 것이다.

범죄자의 인권에 대한 우려는 단순히 범죄자를 편들자는 것이 아니다. 범죄자를 대하는 방식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자국의 국민을 어떻게 취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지점이 바로 범죄자에 대한 처벌이다. 적어도 인권에 대해 신경 쓰는 국가라면, 개인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국가가 개인에게 행할 수 있는 행위에는 넘어서는 안될 선이 있다고 믿는 것이 21세기의 대부분의 국가와 인류가 동의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고, 설사 범죄자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인권의 본질적 속성상, 일단 예외가 인정되고 나면, 그 예외는 끊임없이 확장될 수 있고 결국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빛이 바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범죄자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며, 이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지 범죄자만을 위한 것도,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도 아니다.

권위주의적인 국가권력이라면 당연히 개인의 인권을 위축시키고 국가의 권력을 확장하려는 욕구를 늘 가지고 있게 마련이고, 흉악한 범죄가 발생해서 시민들이 불안해하는 시점이야말로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절호의 시점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불심검문의 부활을 들고나온 것이 바로 그 예인데, 안전을 요구하는 여론을 등에 업고 결과적으로는 개인의 삶에 간여하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국가권력의 확장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사형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가장 극단적인 형벌이기는 하지만, 화학적 물리적 거세와 같은 신체형 역시 심각한 인권침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범죄자라고 해도 국가가 개인의 신체에 직접 손을 댈 수 있다는 것은, 국가와 개인 간의 권력균형이 근본적으로 깨지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국가 자체가 인권침해의 주요 가해자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모든 시민들의 인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국제앰네스티는 이와 관련하여 강제적인 거세를 고문 및 가혹한 형벌의 일종으로 보고, 사법적 절차의 일부로 이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돌이켜보면, 세계사는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잔인한 형벌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일부 국가에 가면, 돌로 쳐서 사람을 죽이고, 손발을 절단하고, 채찍으로 때리는 가학적 형벌을 체험할 수 있다. 가까운 북한의 공개처형과 잔혹한 형벌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미래인가?

반복하지만,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범죄에 대한 강력한 대응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범죄 하나만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범죄를 잡자고 엄벌주의와 신체형에 기대는 것은 악을 퇴치하자고 더 큰 악을 불러들이는 일이다. 게다가 불행히도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도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보다 나은 미래, 개인의 존엄한 삶이 존중되는 사회를 위해서는 아무리 분노가 치밀어 올라도 지켜야 할 선은 지키는 태도가 중요하다.

작년 7월, 노르웨이에서 어린이와 청소년 77명이 살해당하는 천인공노할 학살극이 벌어졌을 때, 노르웨이정부가 보인 반응은 관용과 민주주의였다. 장미꽃을 손에 든 15만 명의 시민들이 모인 추도식에서 오슬로 시장은 “우리는 죄인을 벌할 것입니다. 더 관대해지고, 더 관용을 베풀고, 더 민주적이 되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라고 발언했다. 올해 열린 테러 1주년 추모행사에서 “노르웨이 국민은 우리의 가치를 포용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가해자 브레이빅은 패하고 국민이 승리했다"는 총리의 발언처럼,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범죄에 무릎 꿇는 것이며, 진정한 승리는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선한 의지를 잃지 않는 것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 고은태 국제앰네스티 국제집행위원

한국과 노르웨이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 역시 그런 미래를 꿈꿀 수 있고, 꿈꾸어야 한다. 흉악한 범죄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불안에 떠는 것 역시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 처해서도 진정 우리가 지켜내야 할 가치를 잃지 않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가진 힘의 증거이며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다. 시민들의 분노와 불안에 대해 엄벌주의와 신체형의 포퓰리즘으로 대응하는 정치세력은 옳지 않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와 정치권은 중심을 잡고, 굳건히 지켜나가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시민들에게 설명하면서 전시성 정책이 아닌 정말로 실제적인 대책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직 여론에 영합하려는 정치인들을 엄한 눈으로 가려낼 줄 아는 현명한 시민들만이 그런 정부를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