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ㆍ예술인복지법 개정 시행령 현실과 동떨어져 예술인으로 인정받는 길 줄어

“예술가들 역시 보상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다. …예술분야에서는 승자독식 현상이 강하게 나타난다. 승자독식 현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술세계로 뛰어들고 있다.”

네덜란드의 경제학자 한스 애빙은 저서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에서 승자가 모든 걸 가져가는 예술계의 승자독식 현상을 분석한다. 승자에게 돌아가는 보상이 크면 반대편의 패자들은 그만큼 더 많이 잃는다. 예술계에서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 승자독식 현상이 ‘가난도 기꺼이 감내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승자독식의 부작용은 때때로 치명적이다. 2011년 세들어 살던 주인집에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라며 물었던 작가 최고은씨는 생활고와 지병을 이기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지난달에는 배우 우봉식씨 역시 서울 강남구에 있는 자신의 월세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배우자와의 이혼 후 일용직을 전전하며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주변 지인들의 증언은 변두리로 밀려난 예술인들의 처지를 말해준다.

긴급복지지원사업 대폭 손질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졸업한 이은영씨(가명·29)는 누구보다 최고은씨의 사정을 잘 이해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시인이 되겠다는 순수문학의 꿈을 접어두고 방송작가 아카데미를 수료했다. 글을 써서 먹고 살 길을 찾기 어려웠던 탓이다. 방송 프로그램의 ‘막내작가’급 대우를 받고 있는 지금 월급은 140만원 안팎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지금의 프로그램이 끝나거나 언제든 하차하게 되면 수입은 끊기고 만다. “대학 시절 등록금 대출도 아직 못 갚았는데 방송아카데미 등록금도 대출 받아 냈던 터라 월급 받으면 빚 갚는 데 다 들어간다”는 이씨는 정부의 예술인 긴급지원사업을 신청했지만 ‘예술활동증명’이 되지 않아 신청을 포기했다.

서울 충무로 예술인의 거리에서 영화속 인물로 분장한 연극영화과 대학생들이 마임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최고은씨 사망 이후 제정된 예술인복지법은 목숨까지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 승자독식의 폐해를 막는 최소한의 안전판 역할을 하겠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올해 2월부터는 저소득에 시달리는 예술인들을 긴급구호하는 ‘긴급복지지원 사업’도 시행됐다. 그러나 사업 시행 한 달 만에 긴급지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 기준이 대폭 손질됐다. 3월 31일부터 시행되는 예술인복지법 개정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복지지원의 대상이 되는 예술인의 인정 범위를 축소한 것이다.

예술인복지법에 따라 ‘긴급복지지원’과 같은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면 우선 예술인임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 개정된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따르면 예술인으로 인정받는 길이 이전에 비해 크게 축소됐다. 저작권·저작인접권을 등록하거나 국고·지방비·기금 보조를 받아 예술활동을 한 실적이 있으면 예술인으로 인정받는다는 조항이 삭제됐다. 해당 항목이 삭제된 뒤로는 단 세 가지 경로를 통해서만 예술인임을 인정받을 수 있다. 예술활동을 통해 일정한 수입이 있는 것을 입증하거나, 공표된 문화예술 저작물을 제시해야 한다. 이도 저도 안 되면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문제는 예술활동으로 인정되는 세부 기준이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어 실제 현장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도 이 기준을 맞추기 어렵다는 데 있다. 방송작가인 이씨는 과거 시인 등단을 준비하던 시절 만든 작품들을 활동자료로 제출했지만 공인된 문예지에 게재된 실적이 부족해 예술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문학 말고 방송작가로도 신청할 수는 있길래 기준을 봤는데 입증할 수 있는 소득자료가 없어 포기했다. 근로계약서가 있으면 된다던데 일 시작하고 한 번도 계약서를 써본 일이 없으니 결국 내가 작가라는 걸 입증할 서류가 하나도 없다는 얘기더라.”


예술활동 통한 일정수입 입증해야
예술활동을 통해 일정한 수입을 얻는다는 점만 입증하면 예술가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정작 그만큼의 수입도 벌지 못하는 예술가들이 태반이다. 얼핏 봐선 수입 기준은 낮다. 예술활동을 통해 연간 120만원 이상의 수입이 있다는 사실만 입증하면 된다. 월 10만원 꼴이지만 박준형씨(가명·28)는 자신의 예술활동으로 이만큼의 수입을 거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 “대학이나 기관에서 벗어나 내가 자발적으로 전시 일정을 잡고 싶으면 돈이 들어올 걸 기대하는 게 아니라, 주머니를 얼마나 털어야 하고 얼마나 돈을 아껴야 하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전시를 해서 돈을 번 적, 아니 조금이나마 수입이 생긴 적은 단언컨대 한 번도 없다.”

박씨의 경우는 하나의 ‘예외’가 아니라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문화관광부가 3년 주기로 시행하는 ‘문화예술인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예술인들의 경제적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가장 최근인 2012년 조사자료에 따르면 예술 창작활동을 통한 월평균 수입이 아예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26.2%였고, 월평균 수입이 10만원 이하인 이들을 포함하면 34.4%에 달했다.

전체 예술인의 3분의 1 이상이 예술활동을 통한 수입만으로는 정부로부터 예술가라고 인정받을 수 없는 셈이다. 월평균 수입이 100만원 이하라고 응답한 예술인으로 따지면 전체의 66.5%였다. 그에 비해 창작활동에 들어가는 돈은 적지 않았다. 예술활동에 들어가는 월평균 지출이 10만원 이하라고 응답한 비율은 17.8%에 불과한 데 비해 100만원 이상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0.3%에 달했다.

박씨는 미술 장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예술인이다. 서울 소재의 한 대학교 미대에 적을 두고 있긴 하지만 예술활동을 미술로 국한시키고 싶진 않다고 말한다. “굳이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아야지’ 하는 고집 때문만은 아니다. 흔히 말하는 현대 미술에는 건축이나 음악, 연극 같은 다른 장르가 뒤섞이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예술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제출한 ‘예술활동증명 신청서’에서는 하나의 장르, 하나의 활동유형밖에 쓸 수 없었다. “장르야 그렇다쳐도 활동유형이 창작인지, 공연인지, 아니면 기획인지 하나만 정하라는데, ‘이 모든 걸 혼자서 다 할 정도의 가난한 예술가니까 긴급지원을 신청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박씨는 말했다.

긴급지원 신청과정에서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긁힌 것은 그렇다쳐도 아예 예술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은 충격이었다. 도록과 전시 포스터 등 활동자료를 심의위에 제출했지만 보완자료를 추가 제출하라며 보류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박씨의 예술활동이 보류 처분을 받은 이유 중 하나였다. “어느 한 장르를 특정해서 입증자료를 준비하라는데, 지원금을 받으려면 자기 예술의 정체성까지도 법의 틀에 맞추라는 소리로 들렸다. 여유있게 살겠다는 게 아니라 예술가로 활동할 수 있는 최소한만 지원받고 싶은데도 이렇게 푸대접을 받나 싶어 한숨이 나온다.”

예술활동으로 생긴 수입이 있어도 성격을 입증하지 못하면 예술가 인증을 못 받는 것은 마찬가지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이진형씨(35)는 한 영화의 제작과정에 참여해 보수를 받은 적이 있지만 ‘예술활동을 통한 수입’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씨는 자신이 영화를 ‘창작’하는 예술인이라 생각해 해당 분야로 지원했지만 입증을 위해 제출한 서류에서 제작자로부터 보수를 받은 사실만 확인될 뿐, ‘작가’로 참여해 돈을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 활동증명이 반려된 것이다. “계약서 쓰는 일 자체가 드문 일인데 계약서에 ‘작가’ 지위에서 돈을 받는다는 내용이 없다며 인정 못받으면 세상 천지에 누가 지원을 받을까.”

“장르 특성 무시한 일률적 기준” 비판
연극, 영화, 미술 등 예술 장르마다 나름의 특색은 있지만 수입 입증은 물론 활동내역을 입증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은 공통적이다. 때문에 행정적·정책적 지원을 하려면 예술계 현장의 특수성을 감안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뮤지션유니온의 정문식 위원장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시행령 개정안이 특정 조건을 내걸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배제시키는 논리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만화 분야에서는 만화를 통한 소득이 없으면 아예 자격이 되지 않는다. 수익을 내지 못하면 아예 만화가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저 예술인을 자처하는 동호회 회원 수준으로 보는 것 아닌가.”

문화체육관광부는 “이전의 예술인 기준은 너무 광범위해서 입문예술인이나 생활예술인까지 포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산을 고려하면 전업예술인만을 지원대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현장의 의견이 있었다”고 밝혔다. 시행 한 달 만에 1600명이 넘는 예술인들이 긴급지원을 신청할 정도로 지원이 몰려 예산 조기 소진 가능성까지 있다는 설명이다. 긴급지원을 받을 경우 실업급여 지급기준에 준해 월 100만원씩 3개월에서 8개월까지 지원된다. 올해 긴급지원사업 예산 101억원으로 평균 5.5개월씩 지원한다고 가정할 때 연간 1800여명까지만 지원할 수 있는 셈이다. ‘승자독식’을 막기 위해 시행된 사업이 결과적으로는 선착순 싸움에서 이긴 승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도록 바뀐 셈이다.

예술인들은 당국이 정책 수요 예측에 실패한 이유가 복잡다양한 예술계 현장의 생리를 고려하지 않은 데 있다고 입을 모았다. 정문식 위원장은 “예술인복지법은 제정 당시부터 예술인들의 고용보험 가입과 실업급여 지급이 핵심 사안이었는데, 알맹이는 빠진 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에만 급급해 만들어졌다”며 “예술 장르마다 독특한 특성이 있는 데다, 예술인 개인에 따라 활동방식에 개성이 반영된다는 점을 무시한 일률적인 기준 설정은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개정된 시행령에 따르면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된 3월 31일 이전 기준에 따라 예술활동증명을 받은 예술인들도 올해 안에 또다시 예술활동증명을 받아야 한다. 이미 예술인으로 인정받았더라도 내년부터는 상황이 달라진다는 얘기다. 때문에 예술계 인사들은 이참에 보다 근본적으로 정책 방향을 바꾸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의 한상훈 사무처장은 “예술인들에게 돈 몇 푼 쥐어주는 생색내기가 아니라, 팍팍한 예술인들의 창작환경과 삶터를 개선하는 예술생태계 복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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