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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혜 그림

자신을 31세 생산직 근로자라 밝힌 미혼 남성이 한 인터넷 사이트에 고민을 털어놓았다. 제목은 '결혼과 연애를 포기하는 게 맞는지…'. 몇 년 동안 근무하던 공장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뒤 안정된 일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그는 "돈이 너무 부족해 여자는커녕 친구를 만나는 것이나 경조사 참석도 자꾸 회피하고 있다"라고 적었다. 연로한 아버지와 자신의 대학 등록금 충당을 위해 무리하게 일하다 몸이 많이 상한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외동아들의 부담감 때문에 "눈앞에 좋은 여자가 나타나도 만나거나 잡을 수 없을 것 같다"라는 그에게 한 누리꾼은 "용기를 잃지 말라"는 댓글을 달며 이렇게 덧붙였다. "대기업ㆍ공기업 직원이나 공무원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님과 같은 상황입니다."

가난한 청춘은 결혼과 출산은 물론이고, 그 첫걸음인 연애조차 못한단 말인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건복지포럼> 7월호에 실린 '최근 미혼 인구의 특성과 동향:이성교제를 중심으로'라는 보고서(64쪽 상자 기사 참조)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18~49세 미혼 남녀 가운데 현재 이성교제를 하고 있는 비율은 남성이 33.8%, 여성이 35.6%에 그친다. 10명 가운데 3~4명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연애 중'일 확률은 최종 학력이 고졸일 때보다 대졸일 경우, 취직을 했을 경우, 소득이 어느 정도 많아졌을 경우, 근무시간이 너무 길지 않을 경우 더 높아졌다.

물론 많은 솔로는 여전히 '사랑'을 찾고 있다. 애인이 없는 미혼 남녀 가운데 남성의 64.9%, 여성의 56.5%가 이성교제를 희망했다. 하지만 고용 상태가 불안정한 청춘들은 이런 희망조차 포기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혼 남녀가 비정규직일 경우 정규직보다 이성교제 희망 비율이 남성은 9.5%, 여성은 18.2%나 떨어졌다.

"연애 안 해도 죽지는 않지만 일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연애가 좌절되거나 아예 포기하는 청춘들이 속출하다 보니, 다음 단계인 결혼이 늦춰지거나 보류되는 현상 또한 자연스럽다. 2011년 한국고용정보원의 '대졸자 고용의 질이 혼인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에 근무할수록, 비정규직보다는 정규직일수록, 임금을 많이 받을수록 미혼 상태를 벗어나는 경향이 강했다. 이처럼 높은 결혼 장벽은 자연히 최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걱정거리인 저출산 문제로 이어진다. 이른바 '삼포(연애ㆍ결혼ㆍ출산 포기) 세대'의 확산이다.

'삼포'의 연유는 대개 경제적인 것들이다. 지난 2월 시장조사 전문기관 마크로밀엠브레인이 19~39세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연애ㆍ결혼ㆍ출산을 포기했다고 답한 이들이 꼽은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없어서'였다. 데이트 비용이 부담스러워서(59.9%, 중복 응답) 연애를 포기하고, 전세금이 비싸서(52.1%) 결혼을 포기하고, 맞벌이를 해도 육아 비용이 부담스러워(70.7%) 출산을 포기했다. '학자금 미상환(21.6%)' '구직 신분(17.8%)'도 연애나 결혼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가벼운 지갑은 청춘들의 '연애 세포'까지 말려버린다. 취업준비생 이 아무개씨(25)는 "당장 방세 내는 게 걱정인데 연애는 무슨 연애…, 여자 밥 사줄 돈 있으면 내 옷이나 한 벌 사 입는 게 낫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이성에게 별 관심 없이 자기 생활에만 몰두하는 젊은 남녀를 일컫는 말이 바로 '초식남' 혹은 '건어물녀'다. 이런 신조어를 탄생시킨 일본은 이미 길고 깊은 경제불황의 터널 속에서 청춘들의 '연애 포기'가 사회 전반에 만연한 지 오래다.

ⓒ연합뉴스 서울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앞에서 ‘삼포 세대에게 연애를 허하라’ 참석자들이 키스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2011년 일본의 국립 사회보장ㆍ인구문제연구소가 18~34세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남성의 61.4%, 여성의 49.5%가 교제 중인 이성이 없었고 그들 가운데 절반가량이 "앞으로도 이성교제를 할 생각이 없다"라고 답했다. 일본 경제 주간지 <동양경제>의 지난해 7월27일자 특집 기사에 인용된 한 20대 여성의 말이 이런 현상을 대변한다. "일(아르바이트)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연애는 하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

'성적(性的) 프롤레타리아' 혹은 '1인분 인생'으로 표현되는 이런 가난하고 외로운 청춘의 확산은 '저성장 고령화' 사회의 필연적이고 불편한 결과라는 게 전문가의 분석이다. 한국 2030대 세대의 팍팍한 현실을 조명한 책 <이케아 세대, 그들의 역습이 시작됐다>를 쓴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특임교수는 "많은 청춘이 연애ㆍ결혼ㆍ출산을 원한다. 하지만 그것을 이룰 수 없는 현실을 체감한 후 초기에는 희망 섞인 지연ㆍ보류 상태에 있다가 소득수준 등 미래가 보장되지 않으면 결국 좌절하고 포기해버리는데, 이런 현상은 일본이나 한국뿐 아니라 저성장 고령화 문제를 겪는 모든 국가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을 구제할 방법은 결국 '질 높은 고용'뿐

이성교제를 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경제성'을 따지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지난 7월 마크로밀엠브레인이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데이트 비용에 대한 인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의 72.2%가 "데이트 비용 문제로 헤어질 수 있다"라고 답했다. 현재 연애 중인 미혼 남녀 10명 중 3명은 "데이트 비용이 부담돼 데이트를 미룬 경험이 있다"라고도 답했다. 연애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곽현호씨는 "'김밥천국만 데려가서 헤어진 커플' 등 연애 고민 상담을 하다 보면 갈등을 겪는 사례 70%가량이 돈 문제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여대생과 직장인 남성 커플이 많아지는 추세다. 20대에게도 사회는 모든 게 돈 덩어리고 돈이 없으면 반쪽짜리 데이트밖에 못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흐름이 이렇다 보니 경제불황 속에서 몸에 익힌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소비 패턴을 연인과의 데이트에도 활용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돈 문제'는 남녀 청춘이 만나는 방식까지도 좌우한다. 대학생 박 아무개씨(24)는 "요즘 주변을 보면 연애까지 이르는 절차에 드는 비용이 아깝다며 비교적 관계가 빨리 진행되는 소개팅이나 소셜 데이트 앱 등을 통해 연인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2009년 건국대가 발표한 '2000~2009년 신입생 의식 설문조사 비교ㆍ분석' 자료에 따르면 '이성교제 상대 선택 기준' 문항에서 '성격'을 꼽은 대학 신입생은 30% 이상 줄었고 '경제 능력'을 꼽은 대학생은 두 배 이상 늘었다. 갓 스무 살을 넘긴 청춘들도 애당초 경제성을 따져 연애를 하려는 것이다.

"결혼도 포기했고 그냥 내 몸 하나 건사하자 싶다가도 가끔은 바다에 빠져서 끝없이 떠다니는 기분이다. 따뜻함이 그리우면서도 거기에 매달리고 무너질까 봐 두렵다." 가난한 가정환경에서 월급 170만원으로 생활을 꾸려가느라 결혼을 포기한 상태라는 한 미혼 남성이 소개팅을 제안받은 뒤 마음이 심란하다며 한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하소연한 글이다.

이렇게 '따뜻함'을 포기한 청춘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질 높은 고용'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전영수 한양대 특임교수는 "상대적으로 고령화 정책에 많이 쏠려 있는 국가 복지 자원을 젊은 세대에게도 많이 배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최근 국가가 적극 나서서 육아비 등을 지원해주는 출산 장려 정책도 문제의 실마리를 풀기에 모자란다고 진단한다. 그 정책의 대상은 이미 '연애'와 '결혼'에 성공했거나 성공할 확률이 높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정책 대상 연령을 좀 더 낮춰 학령기에서부터 누릴 수 있는 복지 제도, 이를테면 반값 등록금이나 청년 근로소득 안정책 같은 확실한 복지 대책이 나오지 않는 한 젊은이들은 계속 연애와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다."

변진경 기자 alm242@sisain.co.kr